부산포 해전 승전지 북항에 부산대첩 공원과 기념관을 만들기 위해 부산대첩기념사업회가 준비위원회를 만들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부산시는 물론 시민 모두가 하나되어 공감대를 형성하고 이 사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순신은 우리에게 피끓는 이름이다. 나라에 헌신하고 백성을 아껴 성웅으로 추앙되는 충무공의 리더십을 부산시민정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부산대첩기념관은 역사문화유산으로 부산의 또 다른 관광명소가 될 수 있다. 부산왜관의 역사와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함께 어우르는 미디어 영상관이 만들어 지면 빛과 소리로 새롭게 탄생시킨 빛의 벙커처럼 부산관광의 명소가 될 것이다. 2회에 걸친 충무공 이순신의 부산대첩 일화를 통해 새로운 부산관광의 콘텐츠가 널리 알려지길 희망한다.
글쓴이=장순복 부산광역시 관광협회 부회장(대륙항공여행사 대표)
경남 창원 부두에서 공개된 해군과 전문자문단이 재현한 거북선
불멸의영웅 이순신의 부산대첩은 두 차례 있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제14대 선조 25년(1592년) 음력 4월 13일부터 1598년 11월 19일까지 7년동안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부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왜군본영이 주둔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 본영이 있는 부산포를 공략해 대승을 거두었다.
“충민공 계초”에 부산포 해전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무릇 전후 4차에 걸쳐 출전하여 열 번을 접전하였습니다. 전날 싸울 때에는 적선의 수가 많아야 70여 척을 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대적의 소굴에 열을 지어 정박한 배가 400여 척이나 되었지만 아군은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갖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돌진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움에 꺾이지 않고 하루종일 죽을힘을 다해 공격하였습니다. 전선 100여 척을 깨뜨려 적들로 하여금 심장이 떨리고 간담이 서늘해져 머리를 움추린 채 두려움에 떨게 하였습니다. 비록 왜놈의 머리를 베지는 못하였으나 힘껏 싸운 공로는 먼젓번보다 훨씬 더하므로 전례를 참작하여 공로의 등급을 마련하여 별지의 보고서에 기록하였습니다.”
“녹도만호 정운은 죽음을 각오하고 돌진하다가 적이 쏜 철환에 정수리가 관통되어 전사하였으니 너무 비통합니다.”
이순신 함대는 부산포 공략을 위해 23일간 진법 훈련을 마치고 전라좌수영을 출발했다. 가덕도에 닻을 내린 날은 8월 28일이었다. 양력으로는 10월 3일이다. 가덕도에 도착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새벽에 앉아 간밤의 꿈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처음에는 흉몽(凶夢)같이 생각되었지만 다시 바꾸어 생각해보니 길몽(吉夢)이라 생각되었다.”
10월 4일 낙동강 하구의 길목인 장림포 해전에서 왜적선 6척을 격파하고 가덕에 머물며 군사를 쉬게 했다. 그 다음날 새벽에 출전한 이순신 함대는 화준구미(몰운대), 다대포, 서평포(구평동), 절영도, 초량목(부산세관 인근)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하고 거북선을 앞세워 장사진을 펼치며 부산 앞바다로 깊숙이 밀고 들어갔다. 치열한 전투는 해가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부산시는 1980년 송재식 시장이 재임하고 있을 때 부산포 해전 승전일을 양력으로 환산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로 결정했다.
부산포해전 이후 1593년 2월 10일부터 3월 6일까지 웅포해전 6월 26일 2차 견내량 해전이 있었다. 1594년 3월 4일 읍전포, 어선포, 시굿포, 2차 당항포 해전으로 왜군을 무력화시켰다. 9월 20일 1차 장문포 해전, 9월 30일 영등포 해전,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을 끝으로 약 3년간 이순신 장군의 출전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명나라는 1593년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일본측과 강화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는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1_ 명의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삼을 것
2_ 무역증인(貿易證印)을 복구할 것
3_ 조선 팔도 중 4도를 할양할 것
4_ 조선 왕자 및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 등 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小西行長)와 함께 거짓 외교로 삼국을 혼란에 빠뜨린 심유경은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나라 칙사 담종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표문을 요구하며 강화협상을 이끌었다. 제2차 당항포 해전으로 강화교섭이 어려워지자 명 황제의 이름으로 이순신에게 싸우지 말라는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냈다.
“일본의 각 장수가 모두 갑옷을 풀고 전쟁을 그치고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너희 조선도 전쟁의 어지러움을 벗고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어찌 양국의 이익이 아니겠는가.” 이어 “너희의 각 병선은 속히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서 일본의 진영 가까이 주둔하지 말도록 하라. 아울러 조선군이 왜군과 교전하면 처벌할 것이다.”라는 경고도 담겨있다.
이순신은 병으로 10여일 넘게 앓아누운 와중에도 크게 분노하며 울분을 토했다. 담종인에게 보낸 답서에 “모두가 우리 땅인데 일본 진영 가까이 가서 적을 토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일본과 지금 화의를 맺고자 하는 것은 속임수와 거짓말입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서를 드립니다.
당시 조선은 외교적 협상권도 군지휘권도 빼앗긴 상태였다.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는 대륙으로의 확전을 막고 조선 내 국지전으로 전쟁을 끝내려 했다. 이순신은 적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며 상황에 따라 직접 출동하기도 하고 부하 장수들을 출전시키기도 했다. 부산포의 정보원으로부터 일본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적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정탐을 계속하게 했다. 이순신은 1595년 1월 21일(양력 3월 1일) 장남 회의 결혼식에도 부인의 생사가 오늘내일이라는 기별을 받고도 진지를 떠나지 않았다.
강화협상이 어떻게 진행되든 자신의 몸이 아무리 불편해도 군비 증강으로 조선수군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7년 전쟁은 워낙 강렬해서 다른 기억들을 지워버린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야를 막론하고 “비판자”, “심판자”가 넘쳐났다. 426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도 그 논쟁은 끝나지 않고 있다.
1_간신이라던 원균은 왜 정사에서는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일등공신으로 기리는가?
2_과연 이순신은 완전무결한 인간이었는가?
3_왜 이순신은 합동작전을 펼친 원균의 공로를 가로채는가?
4_군신후배 관계인 원균과 이순신은 왜적을 앞에 두고 왜 반목하게 되는가?
5_이순신의 학익진은 누구의 전공을 막기 위함인가?
6_원균은 왜 권율에게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을 맞아야 했는가?
7_이순신이 지은 큰 죽을 죄 4가지는 무엇인가?
8_원균이 이순신의 뒤를 이어 수군을 혼자 지휘하게 되자 그와 또다시 공을 다툰 자는 누구인가?
9_임진왜란 해전의 최초의 승리는 과연 누가 세웠는가?
10_꼬박꼬박 쓰인 난중일기가 왜 결정적인 부분에서 누락이 있는가?
11_이순신은 왜 자신의 관할이 아닌 남해섬의 곡식 창고를 불지르는가?
12_이순신은 과연 한 번도 왜군에게 지지않고 백전백승을 했는가?
13_이순신이 기효근을 만나기만 하면 꼼짝 못하고 괴롭힘을 당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14_원균을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해 죽게만든 이순신의 다섯 아들은 누구인가?
15_왜 류성룡은 사형을 받기 직전의 이순신을 도와주지 못하고 발을 빼는가?
16_이순신은 왜 원균의 단 하나뿐인 아들을 거짓으로 모함하는가?
17_칠천량 해전에서 왜 조선 수군은 재기불능 상태로 전멸했는가?
18_선조수정실록은 왜 원균을 또 한번 붓으로 죽이고 이순신을 높이는가?
19_원균의 원대한 작전계획은 모함인가, 爭功(쟁공)인가?
20_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에서 건 승부수는 무엇인가?
21_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영광을 누리며 여생을 보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