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스카이트랙스(전세계 항공사와 공항의 품질평가 컨설팅회사) 5성급항공사 선정, 2009년 국내 최초로 세계적 권위의 항공전문지 ATW(Air Transport World)가 해마다 세계 최고의 항공사를 뽑아 시상하는 “올해의 항공사”로 선정, 2010년 스카이트랙스가 국내항공사 최초 전세계 항공사 순위 1위로 발표하는 등 아시아나항공은 명실공히 전세계 탑클라스 항공사였다. ATW상은 전세계 항공사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인 항공사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매년 한 개의 항공사만 선정해 발표한다. 이는 대한항공 보다도 12년 먼저 수상한 기록이다. 특히 이 상은 항공사들에게는 항공업계의 노벨상으로 불릴 정도로 정평이 나있는 권위 있는 상이다.
이처럼 1970년 취항한 대한항공 보다도 19년이 늦은 1988년 취항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대한항공을 앞지르며 세계 최고수준의 평가를 받던 35년 역사의 아시아나항공은 왜 대한항공에 합병되기 직전까지 내몰리며 몰락의 길을 걸어왔을까? 아시아나항공의 모기업인 금호그룹의 탄생부터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의 사명변경후 몰락까지 그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최강락> ceo@gtn.co.kr
금호그룹 초대회장인 박인천회장은 일제강점기시절 나주공립보통학교 졸업후 광주에서 목화장사, 미곡상, 가마니장사, 무명장사를 하다 모두 실패한 후 1929년 경찰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해 순사부장을 거쳐 경부까지 진급하며 순사로 승승장구 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직전인 45년 6월에 파면되어 광복후 반민족특위 처벌도 피한 기이한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제앞잡이였다.
해방후 46년 택시사업을 시작으로 48년 버스운송업에 발을 디디며 광주고속을 만든뒤 타이어사업과 건설업, 석유사업, 73년 전자와 무역상사까지 진출하며 박인천 본인 호인 금호에서 이름을 따 금호그룹이 만들어졌다.
박인천 초대회장이 84년 타계한 뒤 장남인 박성용 2대회장때 사세확장을 거듭하다 88년 아시아나항공을 설립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삼성그룹과의 경쟁에서 금호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해 제2민항으로 출범한 것 자체가 최대의 뉴스거리였다.
특히 아시아나항공이 출범한 다음해인 89년도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허용돼 항공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기였다. 운도 따랐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출범 당시 대한항공은 노후기종만 있어 위험한 항공사로 인식되던 시기였기에, 새 기종으로 안전함을 표방하며 참신한 서비스로 출범한 아시아나항공의 차별화 전략은 큰 반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아시아나항공 출범 당시에는 대한항공이 각종 대형사고로 크게 지탄을 받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박성용 2대회장 시절에는 금호타이어와 금호석유화학을 세계 10위권 내의 메이저 회사로 성장시켰고, 아시아나항공을 취항시는 호재를 맞이 하는 등 금호그룹이 제2의 도약기를 이루는 시기였다.
1996년 차남인 박정구씨가 그룹 3대회장직을 이어받아 금호고속, 금호타이어, 아시아나항공을 중국시장에 진출시켰고, 금호렌터카를 국내 최대 렌터카회사로 발전시키는 등 금호그룹을 재계순위 10위권 이내로 진입시켰다.
그러나 금호그룹의 문제는 3대회장 사망후 3남인 박삼구씨가 2002년 4대회장에 취임한 것이었다. 원래 금호그룹은 박인천 초대회장 사망후 형제들이 돌아가며 그룹을 이끌어온게 불문율 이었다. 박삼구 4대회장은 동생에게 그룹을 물려줄 마음이 애당초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삼구회장의 과욕이 금호그룹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금호그룹명도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 변경했다. 2006년 대우건설을 6조4200억원에 인수했다. 2조는 금융권을 통했고 나머지는 사모펀드를 통해 차입했다. 계약조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인수할 당시 대우건설 주가는 13000원대에서 왔다갔다 할때였는데, 3년뒤 투자자에게 31500원에 구입해 주는 조건이었다. 당시 4남인 현재 금호석유화학 박찬구회장이 강력히 반대했음에도 이를 박삼구회장이 밀어붙였다.
게다가 2008년에는 4조원에 대한통운도 인수했다. 영남권시장 공략을 위해 에어부산도 설립해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했다. 고속과 건설 유통 석유 항공까지 보기에는 완벽한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 이에따라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10년 재계서열이 7위로 급부상 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을 먹은 꼴이었다.
하락세는 시작됐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금융위기가 불어닥쳤고 금호아니아나그룹도 이를 피해가지 못했다. 2009년에는 금호건설과 금호타이어가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룹몰락의 신호탄 이었다.
대우건설을 헐갚에 되팔았고, 대한통운도 cj에 매각했다. 우량계열사들도 차례대로 매각해 나갔다. 금호생명도 매각됐다. 이때 4남인 박찬구회장이 금호석유화학을 분리해 나갔다. 만약 금호석유화학도 분리가 안됐으면 타사로 매각됐을게 분명했다.
불운도 뒤따랐다. 아시아나항공의 노후화된 비행기가 자주 사건사고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회장이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정상적으로 아시아나항공이 운행될리가 만무였다. 2013년 샌프란시스코행 추락을 시작으로 2015년 활주로 이탈사고 등 전세계가 아시아나항공의 안전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2018년엔 기내식 대란도 일어나 세계적으로 조롱거리가 됐다. 기내식공장에 화재도 발생했다. 금호타이어도 중국기업에 넘어갔다. 아시아나항공 여직원들에 대한 박삼구회장의 미투사건도 터져나왔다. 모든 악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앞서 언급했던 스카이트랙스 선정 1위였던 항공사 순위도 28위로 동반 추락했다.
결국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회장은 2019년 경영권을 포기하며 회장직에서 반강제적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버틸수도 없었다. 동생이 아닌 자식에게 물려주려던 꿈은 사라졌다. 금호그룹도 4대회장만에 거의 해체됐다. 4남 박찬구회장의 금호석유화학이 금호그룹 지주회사가 돼버렸다. 이젠 채권단인 산업은행이 아시아나항공을 법정관리하며 대한항공과의 결합만을 기다리고 있다.
훌륭한 인재가 많아 업계에서 칭송받던 아시아나항공이 오너의 판단미스와 과욕으로 인해 그룹은 해체되고 그많은 인재들은 여기저기 떠돌고 있거나 어디로 안착해야할지 몰라 좌불안석이다. 젊은 인재들은 벌써 타기업으로 이직했다. 본인은 교도소를 들락거려야 되는 모양새가 됐다.
어느 기업 아니 회사라도 박삼구회장처럼 경영하면 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오너 한 개인의 욕심과 일탈이 불러온 재벌기업 해체가 얼마나 단순하고 쉽게 이뤄질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사례로 역사에 길이 남게됐다.